1896년까지 남산동·읍포·광양포·도독포·온돌동·유두·지신도 7개의 마을이 있었다
지신도는 광양시에 넘겨 줬다, 목도·송도는 1970년대부터 무인도
선목섬은 묘도 준설토 매립장이 만들어지면서 메워졌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이순신대교. 거북선대교. 묘도대교 개설 전과 후. (사진=여수시)
▲이순신대교. 거북선대교. 묘도대교 개설 전과 후. (사진=여수시)

⑱묘도동

묘도동은 광양만 입구에 있는 묘도동은 여수국가산업단지, 광양제철 및 컨테이너 부두와 율촌지방산업단지에 둘러싸여 있는 광양만권 중심 도서로서 남해안 해상 물류 중심지인 여수반도와 광양항을 연계하는 길목이다. 

섬의 서쪽에 가장 높은 봉화산을 비롯해 동쪽의 유두산, 남쪽의 계림산 또는 남산이 위치해 산 사이 계곡과 바닷가에 계단식 논인 다랭이논과 같은 농경지와 창촌·읍동·온동·광양포·도독의 5개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여수 지역의 지질은 크게 경상 누층군에 속한다. 장기홍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이 누층군을 다시 신동층군·하양층군·유천층군 및 불국사 관입암군으로 구분하고 다시 9개층 또는 암군으로 다시 나누었다. 장기홍의 분류에 따를 때 여수 지역은 경상 누층군 지리산 지체 구조구에 속한다.

지질은 선캄브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변성암류와 이를 부정합으로 덮는 경상누층군 가운데 신동층군, 유천층군과 이들을 관입한 불국사 화성암류로 구성됐다. 묘도의 지질은 신동층군 내 하산동층이 중심으로 층의 두께는 약 1000m로 주로 역암·역질사암·적색 사암·적색 셰일로 구성된다.

하산동층은 묘도항을 중심으로 묘도 서부와 북부를 거쳐 온동 마을까지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2~2.5m 내외의 층을 이룬 충식 석회암은 하산동층의 퇴적 환경을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광양포 마을 입구에는 개구리를 닮은 퇴적암이 있다. 바위에 박혔던 자갈들이 바닷물의 침식 작용이나 염분에 의해 빠져나가 많은 구멍이 형성된 타포니이다. 묘도는 광양만 내에 있는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으로, 예전에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주변에 작은 섬들이 있다.

월내 선착장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어 쑥 내민 곳에는 GS칼텍스 사택이 있다. 이곳은 개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장구미’라고 한다. 장구미 바로 앞에 있는 딴목섬은 썰물 때 육계사주로 연결되어 갑각류를 잡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돌로 바닷가 둘레를 막아 밀물 때 들어왔다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를 잡았던 독살이 있었다.

▲묘도 목도, 1970년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사진=여수시)
▲묘도 목도, 1970년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사진=여수시)

황새·두루미·백로·갈매기 등의 새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새섬’은 월내 선착장에서 가장 가깝다. 썰물 때면 확실히 보이지만, 밀물 때는 가물가물 보인다는 ‘가문여’가 있다. 가문여 앞에는 나무가 많은 ‘목도’가 있는데 동쪽은 넓고 서쪽은 좁은 타원형으로, 썰물 때면 동남쪽의 가문여 쪽으로 육계사주가 연결된다.

묘도 창촌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1km쯤 가면 바다를 향해 솟아나 가는 지형이 있다. 이곳에는 높이 3m, 넓이 5m 정도로 바위가 파여 만들어진 지형인 노치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괴입’이라 불렀다.

‘괴’는 ‘고이’라고도 한다. 굴과 고양이를 의미하는 우리 옛말이지만, ‘구덩이’를 뜻하는 말은 사용하지 않은 언어, 즉 사어가 돼 ‘괴’는 ‘고양이’로만 해석된다. 묘도를 고양이와 연관시킨 땅이름이 되어 쥐 또는 한자 음이 같은 서 씨가 살지 못하는 곳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전설까지 만들어졌지만 ‘구덩이’ 또는 ‘굴’에서 비롯됐다.

1896년까지 묘도에 있었던 자연 마을은 남산동·읍포·광양포·도독포·온돌동·유두·지신도의 7개가 있었다. 소당도·목도·송도·황도·서치도·지신도·선목섬 등 8개의 섬이 소속되어 있었지만, 온동 마을 앞에 있던 지신도는 광양시에 넘겨줬다. 선목섬은 묘도 준설토 매립장이 만들어지면서 메워졌다. 목도·송도는 1970년대부터 무인도가 됐다.

1896년 2월 3일 칙령 제13호에 따라 흥양·낙안·순천·광양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섬들을 묶어 새로운 행정구역인 돌산군을 만들었을 때, 묘도는 지금의 광양 지역인 태인면에 소속됐다. 1899년 돌산군수 서병수가 펴낸 『여산지』에서 각 면과 마을을 소개한 자료에 ”묘도는 돌산군으로부터 80리 떨어진 곳의 태인도 남쪽에 있으며, 둘레는 80리이다. 창촌·읍동·온동 3개 마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전의 남산동이 창촌, 읍포가 유동, 온돌동이 온동으로 변하면서 유두와 지신도가 온동에 포함됐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돌산군이 없어지게 되자 그 속에 포함됐던 섬들은 여수군·고흥군·광양군에 나누어 포함시켰다. 이때 묘도는 여수군 삼일면에 들어갔다. 이후 여천군과 여천시를 거쳐 1998년 통합 여수시의 묘도동으로 자리 잡았다.

▲묘도 전경. (사진=여수시)
▲묘도 전경. (사진=여수시)

면적 11.52㎢ 해안선 23.8km 5개의 부속 도서를 지닌 묘도동의 2020년 12월 말 기준 인구는 631세대로 약 12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묘도동의 인구 감소 요인은 여수시 전체 인구가 줄고 있는 원인인 저출산·노령화에서 비롯되고 있다. 경제·교육·의료 등의 배출 요인도 작용한다. 묘도동의 경제활동은 반농반어 형태였지만 섬진강 하구와 맞닿은 광양만에서 조개류 양식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 선사 시대부터 고려 시대

묘도동 909-3번지에서 조개더미가 확인돼 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로 확인된다. 청동기 시대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은 묘도 우체국 주변에 1기가 있다. 길이 150cm, 너비 100cm, 두께 40cm 크기로 굄돌이 확인되고 있다. 남산 아래에도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 1기가 있고, 창촌에서 곰산개로 넘어가는 길에도 3기가 분포하고 있다.

묘도에서 주어 거둔 청동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2점의 돌칼이 있다. 2점 모두 선장개 앞바다에서 건진 것이라는 점과 형태가 독특하다. 돌칼 Ⅰ은 여수반도에서는 처음 발견된 모습이다. 슴베식 돌칼이 월내동과 돌산읍 세구지에서 출토되었지만, 묘도의 돌칼 Ⅱ와는 형태를 달리하고 있어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다.

▲묘도동 유두산, 온동산성. 묘도산성, 유두산성으로 부른다. (사진=여수시)
▲묘도동 유두산, 온동산성. 묘도산성, 유두산성으로 부른다. (사진=여수시)

온동마을 위에 있는 해발 130m의 유두산 정상에는 산성이 있다. ‘온동산성’, ‘유두산성’ 또는 ‘묘도산성’으로 부른다. 『여천시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 만들어진 묘도목장의 목장성으로 보고 있다.

온동산성은 유두산 정상에서 해발 75m까지 연결되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의 몸통은 산 정상에서 서쪽 비탈진 곳까지 내려오는 동고서저의 형태이다. 성벽은 돌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몸통과 관련된 시설로 성문터 2곳 확인됐다. 주워 거둔 기와의 등쪽은 무늬가 없고, 안쪽 면에 삼베를 댄 흔적이 선명하다.

잘린 면은 안쪽에서 등 쪽으로 살짝 그은 뒤 부러뜨렸는데 이러한 수법의 기와는 순천 해룡산성에서 많은 양이 출토된 적이 있다. 고려 시대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성은 문헌기록은 찾아볼수 없다.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지만 유물 가운데 기와류와 고려시대 것으로 보여 고려시대 쌓아져 이후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이오의 『묘도에서』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순천도호부조에 ”묘도는 순천부의 동쪽에 있으니, 둘레가 60리요, 목장이 있다“고 기록됐다. 또 정이오의 시가 함께 수록됐다. 『여천시지』에는 1404년 지금의 경남 사천 남해현 구라량 만호 임덕수가 남해읍성을 쌓았다. 정이오는 그 기록인 『축성기』를 써주기 위해 묘도 온동에 들렸다. 이때 시를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이오가 쓴 『조풍설』에 박덕공과 함께 경상도 웅천 소속 수군의 전함을 타고, 가덕도를 출항하면서 풍량을 만나 몹시 고통을 겪었다. 이들을 마중 나온 전라원수 전원세의 함대도 함께 풍랑에 시달렸다고 기록했다.

정이오의 다른 시들을 통해 볼 때 당시 제주로 가는 항로는 웅천 가덕도에서 출발해 거제도의 칠천도·견내량·영등포, 남해 관음포를 지났고, 여기서부터 전라좌수군의 전함으로 옮겨 타 순천부 앞바다 묘도를 거쳐 제주도와 가까운 고흥 또는 강진에서 제주도로 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를 오가며 6개월 정도를 바다에서 보낸 정이오는 제주도를 찾은 바닷길을 거꾸로 거슬러 고향으로 향하는데, 이때 『묘도에서』를 지은 것으로 추정돼 이 시는 1401년 제주도로 가거나, 1402년 돌아올 때로 묘도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묘도는 삼일 지역에 있었던 적량부곡에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1409년 향·부곡·소와 같은 특수 행정구역을 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삼일포향은 삼일포면이 됐다.

▲봉화산 정상 봉수대. (사진=힐링 여수야)
▲봉화산 정상 봉수대. (사진=힐링 여수야)

● 묘도목장과 봉수대

묘도봉수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1872년 제작된 『순천부지』에 지금 율촌면 송도·장도 와 함께 요망처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여수와 광양 사이의 광양만 입구에 있는 묘도의 지리적인 입지와 조선 초기부터 군사시설로서 목장이 운영되고 있던 점에서 묘도봉수의 설치 배경을 읽을 수 있다. 1895년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묘도봉수의 성격 및 기능은 순천부의 행정구역에 포함돼 군사적으로 전라좌수영의 통제를 받았던 여수 지역의 상황에서 진례만호진과 여수석보를 비롯해 직봉 제5거의 사잇봉수인 돌산도봉수→ 영취산(진례산)봉수→광양 건대산봉수→순천 성황당으로 이어지는 사이에서 광양만 일대의 비상 상황을 전라좌수영과 순천부에 전달하는 권설봉수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에서 여수국가산단 진입도로 개설공사 제2공구 구간 내에서 읍동과 창촌 유적이 확인돼 시굴조사를 실시했다. 두 유적에서는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는 자기·도기·기와류가 확인돼 묘도목장 및 봉수와 관련된 유물로 판단됐다.

묘도봉수에서 발견된 제사유구는 봉수 동쪽 벽의 무너져 내린 석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시굴 당시 석재 사이에서 흙으로 빚은 말과 많은 기와류가 출토됐다. 바닥면에서는 동전과 쇠로 만들 말을 비롯해 자기류 등이 발견됐다.

▲1872년 제작된 순천부지도에 송도.장도.묘도가 표시 돼 있다. (사진=여수시)
▲1872년 제작된 순천부지도에 송도.장도.묘도가 표시 돼 있다. (사진=여수시)

● 묘도와 왜교성 전투

묘도는 임진왜란의 막바지인 1598년 9월 하순부터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벌어지기까지 약 2개월 동안에 걸친 왜교성 전투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연합 수군이 진을 쳤던 곳이다. 왜교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낮은 구릉에 내·외성 2중으로 쌓아 만든 석성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 기지 겸 최후 방어 기지로 삼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순천 왜성은 ‘왜교’ 또는 ‘예교’라 한다. 일본 사람들은 ‘순천성’이라 부른다. 1998년 1월 1일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승주 신성리성’으로 불렸다.

1597년 8월 초 4만9000명의 일본군은 우키나 히데이에를 좌군 장군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삼아 수군까지 합해 경상도 사천과 하동에서 전라도 남원성으로 진격했다.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바깥 성곽 2502m, 안쪽 성곽 1342m로 해자로 추정되는 호는 묻혀 흔적만 남아 있다.

『섬호집』에 북쪽과 연결된 곳에 해자를 팠다고 기록되어 있어 물을 연상할 수 있지만, 물을 채우지 않은 마른 해자나, 해자를 파면서 나온 흙으로 토성을 만들었을 수 있다. 산마루에 돌을 층층으로 쌓아 올린 이 성의 중간에 가장 높은 대가 세워져 있다. 일본군들이 그들의 신을 모신 천수대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순천 왜성 코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했던 곳. (사진=나무위키)
▲순천 왜성 코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했던 곳. (사진=나무위키)

왜교성 전투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1598년 9월 20일부터 유정의 명령에 따라 육군이 순천의 부유로 철수했던 10월 7일까지이다. 2단계는 10월 16일 유정이 왜교성 가까이에 진을 친 뒤 11월 중순까지 특별한 전투 없이 사태를 지켜보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제공하고자 했던 시기이다. 3단계는 11월 12일 왜교성 앞바다에서 전개된 해전부터 19일 노량해협에서 펼쳐진 마지막 전투까지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을 이끄는 진린도독과 함께 묘도 앞에 있는 율촌면 장도 입구에 진을 쳤다. 한편 경상 우수사 이순신이 노량수로를 막게 함으로써 묘도 앞바다인 광양만에 전운이 감돌게 됐다.

『난중일기』를 비롯한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료에 대한 주석과 해설에는 유도의 위치를 광양시 골약면 송도 또는 여수시 율촌면 송도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과 『선조실록』 등의 임란 관련 사료에는 유도가 아닌 묘도로 기록돼 해석에서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난중잡록』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발대 10여 척이 묘도밖에 이르자 수군이 모조리 격파하여 죽였다“고 묘도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 대교 조망권을 위한 전망대를 실내형으로 건축한 이순신대교 홍보관. (사진=여수시)
▲이순신 대교 조망권을 위한 전망대를 실내형으로 건축한 이순신대교 홍보관. (사진=여수시)

● 이순신대교와 홍보관

여수국가산업단지 확장과 율촌 1·2지방산업단지를 비롯해 광양항 컨테이너 부두 2단계 사업 등이 추진됐다. 광양만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비롯해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개최에 따라 국도 17호와 2호선을 넓히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늘어날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새로운 교통로가 필요했다.

여수국가산단과 광양국가산업단지를 이어 물류비용을 줄이고, 2012년 여수세계 박람회를 원활하게 진행해 한려해상국립공원 등 서남해안 관광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하여 여수국가산업단지에서 묘도를 거쳐 광양시 금호동 사이를 잇는 ‘묘도대교’와 ‘이순신대교’가 건립됐다. 묘도에는 2014년 3월 개관한 이순신대교 홍보관이 있다. 거북선 모양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만들어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건물에 반영했다.

1층 홍보관에는 이순신대교와 세계 주요 다리의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됐다. 영상관은 이순신대교 건설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전망대는 이순신대교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실내형으로 건축했다. 야간에는 이순신대교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

▲봉화산 정상에는 공원조성과 함께 봉수대가 있다. (사진=여수시)
▲봉화산 정상에는 공원조성과 함께 봉수대가 있다. (사진=여수시)

● 봉화산 전망공원과 도독 마을 벽화

여수국가산업단지와 광양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묘도 봉화산의 특성을 살린 전망공원이 2012년 공사에 들어가 2014년 완공됐다. 이순신대교 홍보관으로부터 걸어서 약 20분 거리에 있어 접근성도 좋은 편이다.

드나드는 도로 주변과 전망대에는 태양광과 풍력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친환경 가로등이 설치돼 여수국가산단과 이순신대교를 비롯해 광양항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정상에는 문화재청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 복원한 봉수대와 전망대 등이 만들어졌다. 경사진 산비탈을 개간해 층층이 만든 다랭이논이 철마다 새로운 색깔을 입는 아름다운 모습과 일출을 볼 수 있다.

묘도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군을 형성해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운 왜교성 전투와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것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수하려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1598년 7월 본격적으로 남해안에 있는 왜성들을 공격하는데, 순천 왜교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공격 목표로 육지에서 3방향 및 진린 도독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의 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사로병진 작전계획을 세웠다.

9월 20일 진린이 묘도에 진을 치고 조명 연합 육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의 총력전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음력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피해도 컸다. 사도 첨사 황세득, 군관 이청일 등이 전사하는 등 조선 수군의 피해도 많았다.

▲묘도 도독 마을. (사진=여수시)
▲묘도 도독 마을. (사진=여수시)

진린은 적의 퇴로를 열어주는 고니시의 휴전 제의에 넘어가 병력과 함께 1598년 10월 9일, 고금도로 철수했다. 진린은 적들의 뇌물 공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순신 장군의 강력한 설득으로 1598년 11월 11일 다시 묘도에 진을 친 뒤 18일 노량해전에 참전했다.

이로써 진린이 묘도에 진을 친 기간은 두 차례 27일이 된다. 묘도의 도독 마을이 바로 조명·연합 함대의 사령부로 ‘도독’이라는 땅 이름은 진린의 직위인 ‘흠차총령수병어왜총병관전군도독부도독수군도독’에서 비롯됐다.

도독 마을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마을을 알리기 위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과 진린 두 장군의 상징물과 당시의 상황을 벽화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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